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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by Casey,Riley 2022.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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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영 지음 / 행복한작업실
이 책은 서양 미술사에 획을 그은 작품들이 어떤 방식으로 인류의 관점을 변화시켜 왔는지 살펴
보고, 불멸의 존재로 기억되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예술혼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본다. 무엇보다 조금도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통해 미술을
해석하는 안목을 제공하고 난해해 보이는 서양 미술의 역사를 꿰뚫게 해준다는 것이 이 책의 강
점이다.

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피지영 지음

▣ 저자 피지영
평범한 문과형 직장인이다. 우연히 미술 강연을 영상으로 보던 중 머릿속에 번개가 쳐서 3년 동안 미
술 관련 서적 1,000권을 독파하고 서양 미술 도슨트가 되었다. 미술이 주는 감동과 행복을 나누기 위
해 퇴근 후와 주말에 서양 미술 강의를 하고 있다. 유럽 미술관을 순례한 뒤 『유럽 미술 여행』을 펴
냈고, 미술 작품과 현대인의 삶을 절묘하게 엮은 소설 『영달동 미술관』(공저)을 펴냈다.

▣ Short Summary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을 어렵고, 무언가 고고하고 격식 있으며 품위가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나
와는 한참 거리가 먼 사람들이나 즐기는 것이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 역시 40여 년을 그렇게 살
았다. 지금은 몇 권의 책을 쓰고 남들 앞에서 강의를 하지만, 제대로 미술을 공부한 사람들 앞에서 나
는 여전히 B급이다. 어쩌면 C급, D급일 수도 있고, 감히 급수를 매기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미술을 알아가는 동안 나는 그 어떤 선생님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책이 유일한 스승이었다. 미술과
관련한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었고 특별할 것도 없는 40대 직장인이었던 내가 미술에 푹 빠져 3년을
살았다. 이제는 어떤 작품 앞에 서면 감동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렇게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다. 정규 과정을 거치며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조
금만 관심을 갖고 알아간다면 미술은 어느새 곁을 내어준다.
올 여름 내내 유독 한 친구와 자주 만났다. 비가 오는 날, 술 한잔하는 걸 좋아하는 동갑내기 친구다.
동호회에서 만나 16년간 인연을 이어왔다. 우리의 대화는 흔한 50대 아저씨들의 것과는 분명 달랐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를 초대하고, <미스 사이공>이 준 감동을 나누고, 바그너와 렘브란트, 바스키야를
들먹인다. 이 친구나 나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는 나눌 수 없는 이야기다. 우리 또래의 중년 남성들
은 그런 주제에 도통 관심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미 예술에서 감동을 느
꼈고 예술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 가사에 가슴 뭉클해지고, 소설 속 한 구절에 먹먹해지는 것을 경험하듯, 그림 역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고 우리의 감성을 고양시킨다. 모르고 살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스카이 캐슬
> 주인공의 집 벽에는 라파엘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피카소의 명화가 보인
다. 버스 정류장에서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을 찾아볼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
은 미술을 접한다. 미술은 결코 고상한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즐기는 고급 취미가 아니다.

▣ 차례
책을 시작하며 - 그들이 있기에 나는 지금 행복하다
인증 샷, 근대 유럽 초기부터 유행하다 _ 풍경화의 대가 안토니오 카날레토의 ‘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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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나폴레옹 우상화에 목숨을 건 화가 _ 신고전주의 창시자 자크 루이 다비드 이야기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가 진품일까? _ 또 다른 〈모나리자〉에 대한 끊임없는 소문과 주장들
대문호 스탕달을 주저앉힌 그림 한 편 _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에 얽힌 이야기
정점에 오른 순간 몰락이 시작되었다 _ 바로크 미술의 대가 렘브란트의 〈야경〉에 얽힌 이야기
나이키를 참수하라! _ 성상 파괴 운동으로 수난당한 예술품들
서양 미술사 이야기 1 고대 동굴 벽화부터 중세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당신이 세상의 주인공! _ 플랑드르 화가 브뤼헐의 독특한 신화 해석
보석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_ 영롱한 파란색 울트라마린 이야기
드디어 유다가 예수와 겸상을 하다 _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 찾기
아동 성추행범으로 쫓아내더니, 이제 와서… _ 오스트리아 천재 화가, 에곤 실레 이야기
벽지보다 못한 그림이 서양 미술사를 전복하다 _ 〈인상, 해돋이〉로부터 인상주의가 시작되다
공모전 낙선자가 해결한 120년 난제 _ 피렌체 대성당 ‘돔’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 이야기
서양 미술사 이야기 2 르네상스, 드디어 예술가가 나타나다
예수, 나폴레옹 군대에 총 맞아 죽다 _ 〈1808년 5월 3일〉을 그린 고야 이야기
르네상스 대표작에 새겨 넣은 영원한 사랑의 표시 _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숨겨진 로맨스
세계 최고의 권력자에게 대든 일개 장인 _ 〈천정화〉와 〈최후의 심판〉을 그린 미켈란젤로 이야기
아버지와 딸이 같은 주제, 다른 표현으로 그린 그림 _ 최초의 페미니스트 예술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
스키
짝다리를 짚어야 아름다운 예술이 됩니다 _ 서양 미술 속 자세에 얽힌 사연들
예술의 천사는 딱 37년 동안만 _ 미술의 천사, 음악의 천사
서양 미술사 이야기 3 화려한 귀족 예술, 바로크와 로코코
어렵기만 한 현대 미술은 CIA 때문에? _ 현대 미술, 어떻게 보아야 할까?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자가 핼리 혜성을 발견했다고? _ 인간이 땅을 딛게 만든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자
조토 이야기
야한 그림 속 그녀가 내게 말을 건다면? _ 인상주의의 아버지 마네 이야기
유럽 유명 미술관에 버젓이 전시하고 있는 복제품 _ 고흐의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
공익광고, 18세기 영국에 있었다! _ 예술 불모지, 영국의 예술을 격상시킨 윌리엄 호가스 이야기
서양 미술사 이야기 4 신고전주의 vs 낭만주의
17세기 루벤스의 그림 속에 등장한 조선인? _ 루벤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스티브 잡스의 원조는 르네상스 ‘자뻑’ 화가 _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알브레히트 뒤러
어느 화가의 뮤즈, 필리데 멜란드로니 _ 〈성모의 죽음〉을 그린 카라바조 이야기
단란한 식탁에 해골이? _ 서양 정물화 속에 담은 교훈 ‘바니타스 정물화’
뒤로 물러서 그림을 보세요, 놀라운 마법이 펼쳐집니다 _ 바로크의 거장, 벨라스케스 이야기
서양 미술사 이야기 5 인상주의부터 현대 미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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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피지영 지음

나이키를 참수하라! _ 성상 파괴 운동으로 수난당한 예술품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작품은 <니케> 조각상이다. 19세기 그리스 북동
부의 사모트라케라는 섬에서 발견되어 <사모트라케의 니케>라고도 불린다. 니케를 영어로 읽으면 그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가 된다. 니케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승리의 여신으로, 니케의 조각
상은 뱃머리에 부착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부적으로도 쓰였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니케 여
신상>은 바람에 날리는 옷 주름이 결코 돌 조각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사라진 얼
굴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훌륭하지만 완전한 작품은 얼마나 더 대단했을까?
왜 이런 작품이 훼손됐을까? 운반 도중 깨지고 떨어졌을까? 의문이 이어진다.
작은 바위산 하나를 깎아 만든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코가 훼손돼 있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집트 원정 시 스핑크스의 코를 표적 삼아
대포 연습을 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은 확실한 오류다. 당시 나폴레옹을 따라 다니며 기록화를 그렸
던 장 레옹 제롬(1824~1904)의 <스핑크스 앞의 보나파르트>라는 작품을 보면 이미 스핑크스의 코가
깨져 있다. 예술에 심취해 전 세계 정복지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약탈했던 나폴레옹의 성격으로 보아
프랑스 군대가 스핑크스를 훼손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나폴레옹보다 훨씬 앞서 이집트
를 여행한 작가의 스케치에서도 스핑크스는 이미 정상적인 코 상태가 아니었다.
이집트의 역사가 알 마크리지(1364~1442)는 이슬람교 광신도 알다르가 1378년 스핑크스에 사람들이
제물을 바치는 것을 보고 격분해 파괴했다고 기록했다. 이슬람교도 입장에서는 우상 숭배로 생각한 것
이다. 떨어져 나간 코 주변에 망치와 끌로 작업한 흔적이 남아 있어 신빙성을 더해준다.
8세기에서 9세기경 유럽에서는 성상 파괴 운동이 한창 기승을 부렸다. 성경 <출애굽기>에 기록된 십
계명 중 두 번째 계명(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 20:4)이 그 근거다. 수많은 신과
예수는 물론 성인들을 묘사한 그림과 조각 등의 형상이 우상으로 여겨져 파괴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로마 제국이 동과 서로 나뉘어 있었다. 성상 파괴 운동은 동로마에서 먼저 시작됐는데 그 이유는 아직
도 명확하지 않다. 성경 문구 그대로를 따르겠다는 순수한 의도 외에 황제가 성직자를 견제하기 위해
성상 파괴 운동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일반 신도들이 성상이 있는 교회를 찾아 헌금하는 것을 금
지시켜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한편 살아 있는 황제 숭배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마 쪽에서는 생각이 달랐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어서 그림과 조각은 신도
들에게 기독교의 역사와 신앙을 알려주는 데 유용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서로마에서는 유명무실한 황
제보다 로마에 있는 교황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 로마에 있는 교회와 유적지에 전시된 성스
러운 예술품들을 보기 위해서는 전 유럽에서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교황이 이것을 포기할
리도 없었다. 서로마에서는 성상이 십계명에서 명시한 우상이나 형상과는 다르다고 역설했다. 단지 상
징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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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서기 610년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교 역시 성경의 구약을 따른다. 특히, 이슬람교는 우상 숭
배를 철저하게 배격해 동로마에서 시작한 성상 파괴 운동을 적극 받아들였다. 기존에 남아 있던 수많
은 예술 작품을 없애는 것은 물론 무엇을 떠올릴 만한 형상은 절대로 만들지 않았다. 이 전통은 지금
까지도 이어져 이슬람 문화권에는 사람 모양을 한 조각과 위대한 성인들의 모습이 담긴 회화 작품이
없다. 이슬람 예술가들은 대신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양으로 그들의 기술을 뽐낼 뿐이다.
16세기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주창으로 종교 개혁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가톨릭에 맞선
개신교는 여러 가지 이견과 해석으로 또다시 여러 종파로 나뉘어 서로 맞서기도 했다. 성상 파괴도 그
문제 중 하나였다. 루터의 경우 성상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편이었으나 스위스의 울리히 츠빙글리는
교회 안에 그 어떤 형상도 두지 않도록 했다. 이때 교회에 작품을 납품할 수 없어 수입이 없어진 예술
가들이 눈을 돌린 분야가 부유한 상인들의 인물 초상화와 정물화, 풍경화 등이다.
이슬람 세력권 안에 있는 예술품들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리스 시대의 청동 작품들은 대부분 녹여
무기를 만드는 데 쓰였다. 그로 인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그리스의 청동 작품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
은 대리석 작품이다. 그러나 대리석으로 만든 작품도 수난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돌은 녹여 없앨
수 없으니 바다 속에 밀어 넣거나 강물에 수장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버리기에 어렵거나 작품 자체가
무거워 운반할 수 없었을 때는? 훼손했다.
예로부터 동양과 서양 모두 큰 죄를 진 사람은 목을 베어 참수했다. 그보다 작은 죄를 지었을 때는 코
를 자르는 의형, 발꿈치를 자르는 비형, 생식기를 자르는 궁형 등을 시행했다. 예술 작품들은 생명이
없는 형상이지만 우상이라고 여겨 이러한 형벌을 가했다. 지금 남아 있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을 조각
한 작품들이 상당수 훼손됐다. 앞서 말한 루브르 박물관 니케의 형상도 아마 그렇게 훼손당했을 것이
라 추정한다.

드디어 유다가 예수와 겸상을 하다 _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 찾기
2004년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댄 브라운(1964~)의 『다빈치 코드』는 기독교의 오랜 미스
터리였던 성배를 찾는 스릴러 소설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성배를 문자 그대로 컵이 아닌 여자의 자궁
을 은유한 것이라 설정했다. 그 단서가 되는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머물던 1495년에서 1497년 사이에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
에 성당 벽에 프레스코화로 그렸다. 예수가 죽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 중에 나를 배신할 제자가 있다”라고 말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르네상스의 특징인 선 원근법
이 뚜렷하게 보이며, 레오나르도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안정된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의 세
로를 삼등분하면 식탁과 예수 머리 위 창문을 정확히 가른다. 가로를 삼등분하면 인물이 각각 3명씩
들어가 있다. 또한 대각선으로 그림을 분할하면 소실점은 정확히 예수의 얼굴에서 만난다. 숨 막히게
꽉 짜인 수학적 비례지만 인물들의 살아 있는 듯한 표정과 몸짓이 그림을 생생하게 만든다.
댄 브라운은 예수의 오른쪽 인물과 벌어진 사이 삼각형이 성배의 모양을 상징한다고 했다. 예수 오른
쪽에 앉은 사람은 그의 제자가 아니고 여성, 즉 예수의 아내라고 추정되는(물론 『다빈치 코드』 속에
서) 막달레나 마리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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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소피는 예수의 바로 오른쪽에 앉은 인물을 면면히 들여다보았다. 인물의 얼굴과 몸을 살피는 동안 그
녀 내부에서 충격이 일어났다. 그 인물은 흐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과 섬세하게 모아 쥔 손 그리고 살
짝 솟은 가슴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없는…… 여자였다. -『다빈치 코드』 2권 11p, 2004, 베텔스만
이 소설을 읽으며 깜짝 놀란 사람들이 많다. 왜 레오나르도는 여자를 그려 넣었을까? 정말 성배를 상
징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완벽한 허구다. 사실 서양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
이 있는 사람이라면 댄 브라운의 소설 설정에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서양 미술에서 나타나는 사도 요
한의 모습은 한결 같다. 여자같이 예쁜 얼굴에 다른 제자들과 달리 유독 수염이 없는 모습으로 표현했
다. 열두 제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렇게 그렸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서양 미술 속 요한은
무조건 그렇게 그렸다. 서양 미술에는 공식과도 같은 것이 있다. 당시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적
었기 때문에 그림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징으로 표현해야만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
을 그릴 때 거북선을 배경으로 해야만 어떤 인물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성당의 식당 벽에 그려져 있다. 중세 이전부터 최후의 만찬 장
면은 서양 미술에서 중요한 소재였다. 특히, 식사하는 장소인 만찬장에 많이 그려졌다.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신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밀라노 성당
처럼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도 있고 캔버스에 그려서 식당 혹은 근사한 만찬 장소에 걸어두기도 했다.
물론 그 그림들 속에서 요한은 어김없이 수염이 없는, 마치 여자처럼 그려져 있다.
서양 미술 속 수많은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서 재미있게 감상하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유다
찾기”다. 가롯 유다는 예수를 은화 30냥에 밀고했고 그 죄책감에 자살을 한 열두 제자 중 한 명이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권에서 2천 년 동안 유다는 악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예로부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나 성인들의 머리 부근 혹은 몸 전체 뒤쪽으로 ‘님부스’라고 하는 밝은
빛이나 원형 테두리 등을 그려 넣었다. 위대함과 성스러움의 표현이다. 흔히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보고 이렇게 얘기한다. “와, 어제 누구를 봤는데, 뒤에서 아우라가…….” 아우라는 독일 철학가이자 예
술 평론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이 만든 말이다. 예술 작품에서 모조품이 도저히 따르고 흉내 낼
수 없는 원본의 분위기와 고상한 품격을 일컫는 것이다. 님부스는 기독교 인물뿐 아니라 불교문화, 더
나아가서는 이집트, 아메리카 대륙에서 신의 형상을 묘사할 때 그림과 조각에서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앞서 말했듯 서양 미술에서는 공식처럼 거의 ‘의무적’으로 삽입해야 했다. 현실 자각에 눈을 뜬 르네상
스 시기에 와서 점차 희미해지면서 바로크 시대에는 종적을 감춘 미술 기법이다.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유다 찾기’는 매우 쉽다. 예수를 포함한 총 열세 명의 인물 중 유독 유다만 이
님부스가 없다. 예수를 배반한 악인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장치를 해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3대 천재다. 찬란한 르네상스를 정점으로 이끌었고 다
음 예술 사조인 매너리즘과 바로크를 예고했다. 이들은 성인들에게서 님부스를 걷어낸 과도기적 예술
가들이다. 라파엘로의 성화를 보면 님부스가 있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봐야 보일 만큼 아주 희미하게 그
려져 있다. 거의 대부분의 그림을 교황의 주문으로 그려야 했던 라파엘로였기 때문에 기독교의 ‘공식’
으로 님부스를 넣어야겠지만, 그것이 현실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겨우 그리는 ‘시늉’만 했을 것이
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에서 님부스를 모두 걷어냈지만 예수 뒤에 교묘한 장치를 두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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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문 위쪽의 아치형 장식이 마치 예수의 님부스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열세 명 중 유다를 찾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겸상’하지 않은 사람을 찾으면 되
는 것이다. 작가들은 유다가 감히 거룩한 만찬에 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멀찍이 두었다. 식탁 끄
트머리에, 아니면 화면에서 보이는 예수와 제자들과는 달리 반대편 자리에 등을 돌리게 하고 앉혔다.
어떤 작품에서는 님부스 대신 머리 위에 악마의 형상을 그리기도 했다. 그래야 설명이 없어도 누구나
유다를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이런 판에 박힌 그림 구성이 싫었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드디어 유다를 예수
와 ‘겸상’시켰다. 유다가 만찬 식탁 안쪽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님부스도 없고, 앉은 자리 구분
도 없는 유다를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는 어떻게 찾아낼까? 유다를 찾는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바로 예수를 팔고 유대인에게 받은 은화 30냥이 든 돈주머니다. 그는 식사를 하면서도 돈주머니를 오
른손에 꼭 쥐고 있다. ‘유다 찾기’의 세 번째 방법이다. 레오나르도 그림에서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서양 미술 속 유다는 이 돈주머니를 놓지 않는다. 서양 미술의 공식이니까.

공모전 낙선자가 해결한 120년 난제 _ 피렌체 대성당 ‘돔’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 이야기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원근법,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이다. 철저하게 수학적으로 계산된 원근법을
만들어 그림은 물론 공학에도 활용한 인물이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다. 첫 번째 르네상스
건축물은 그가 만든 피렌체 고아원이다. 그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르네상스 최초의 그림인 마사초
(1401~1428)의 <성삼위일체>가 탄생했다. 이 그림은 정교한 원근법이 적용되어 처음 보는 사람을 놀
라게 했다. 마치 벽을 파내서 만든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브루넬레스키는 원래 조각가를 꿈꾸었다. 그가 20대 초반일 때, 피렌체에서 세례당
청동문을 공모했다. 12세기 건축된 산조반니 세례당은 지금의 대성당인 산타마리아 델피오레(피렌체
대성당, 두오모.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가 지어지기 전까지 피렌체의 주성당 역할을 했다. 이곳은
피렌체 시민 대부분이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던 중요한 곳이다. 세례당에는 동쪽, 남쪽, 북쪽 세 곳
에 출입문이 있다. 이 가운데 동문에 청동 부조 조각을 새겨 넣고자 1401년 피렌체시가 공모전을 열
었다.
공모 주제는 ‘이삭의 희생’이었다. 7명이 지원한 가운데 브루넬레스키는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로
렌초 기베르티 1등으로 당선됐다. 브루넬레스키는 이때부터 조각을 그만두고 친구인 조각가 도나텔로
와 로마로 가서 고대 건축을 공부했다. 어찌 보면 브루넬레스키의 낙선은 피렌체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당시 피렌체는 1296년 착공한 대성당(피렌체 대성당)을 완성하지 못한 채 방치하고 있었다. 도시 국가
피렌체의 부를 과시하고자 약 3만 명이 들어설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성당을 설계했지만 당시는 이 거
대한 성당의 지붕을 얹을 기술이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에서 특히 판테온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
다. 2세기에 지어진 판테온은 그때까지 세계 최대의 돔을 가진 건축물이었다. 수년간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을 분석했다.
피렌체로 돌아온 브루넬레스키는 자기만이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피렌체시는 기베르티를 공동 관리자로 임명해 돔 제작을 시작한다. 공사를 이어가던 중 브루넬레스키
가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아 작업이 진척되지 않았다. 집에 찾아온 관계자들에게 “그 잘난 공동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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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임자에게 물어보면 될 것 아니오”라고 답했다. 사실 기베르티는 건축에는 서툴러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계획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결국 기베르티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브루넬레스키의 멋진 복수가 성공한
것이다.
사실 피렌체 대성당보다 앞서 지어진 건축물 중에는 이보다 더 높은 것들이 많다. 그 비밀은 플라잉
버트레스(공중부벽)다.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높은 건축물 옆으로 축대를 대는 것이다. 사방에서 받
쳐주는 공중부벽으로 무게를 분산시키면 높게 건축물을 올릴 수 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쾰튼
성당이 이렇게 지어졌다. 이런 양식을 ‘고딕’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끔찍이 싫어했다. 수학
적으로 비례에 맞춰 정갈하게 짓지 않고 버팀대가 여기저기 삐죽삐죽 튀어나온 건물은 야만스럽다고
여겼다. 예전 로마를 침입하던 야만족 ‘고트족’이나 사용하는 것이라는 경멸을 담아 고딕이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다. 이탈리아 제1의 도시 피렌체에서 고딕 양식으로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
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바닥에서 51미터 높이에 지름 43미터의 돔을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처럼 철근과 크레인이 없는 상태에서 비계(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설치하는 임시 가설물, 버팀대)
를 놓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작업하는 동안 비계가 과연 돔의 무거운 하중을 지탱해줄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어떤 기술자는 성당 안에 흙을 가득 채운 후 돔 작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흙 속에 동전을
많이 넣어두면 지붕이 완성됐을 때 너도 나도 흙을 퍼갈 테니 치우는 것도 문제없다고 했다. 이런 황
당한 의견이 나올 만큼 돔 공사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모두가 브루넬레스키에 주목한 것은 당
연했다.
브루넬레스키는 우선 설계도에 수치를 기입했다. 그전까지 설계자는 대략적인 윤곽만 그리고 세부적인
작업은 숙련된 인부들의 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건물이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아울러
오늘날의 크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카스텔로’를 개발했다. 소 한 마리 힘으로 작동하는 이 기계 장치
덕분에 높은 곳에서의 공사가 한결 수월해졌다.
브루넬레스키가 고안한 피렌체 대성당 돔의 핵심은 ‘이중 돔’이었다. 안쪽과 바깥쪽에 이중으로 돔을
세운 이중 돔은 그 사이 빈 공간이 돔의 무게를 획기적으로 줄여주었으며 무게를 지탱하는 뼈대를 넣
을 수 있었다. 또한 대리석 등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약 4백만 개의 벽돌을 사용했다. 벽돌을 일반적
으로 반듯하게 쌓아올리면 기울기 때문에 위로 올라가면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헤링본 패턴’
으로 쌓았다. ‘청어 뼈’라는 뜻으로 사선 모양의 지그재그로 벽돌을 얹었다. 이렇게 벽돌을 쌓으면 매우
견고할 뿐만 아니라 위로 갈수록 좁아지도록 쌓는 것이 가능해 벽돌의 추락을 막았다. 이처럼 한 사람
의 천재적 발상으로 피렌체 대성당 돔이 완성되었다. 돔 제작에는 13년이 소요됐으며, 성당이 착공한
해로부터 따지면 140년이 걸렸다.
그러면 또 다른 조각 천재 기베르티는 그동안 무엇을 했을까? 1401년 공모전에 당선된 후 21년에 걸
쳐 동쪽 문 청동 부조를 완성했다. 동문을 완성시킨 뒤 기베르티는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로
등극한다. 그래서 다시 북쪽문 청동 부조를 의뢰받아 무려 27년 만에 완성시켰다. 이때 완성한 북쪽
문이 이전에 제작한 주문인 동쪽 문보다 훨씬 아름다워 두 문을 교체했다. 뒤에 제작된 동문을 본 미
켈란젤로는 “천국에 문이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을 것”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때부터 동문은 ‘천국의
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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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지금 피렌체 국립 바르젤로 박물관에 가면 1401년,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가 공모전에 출품했던 작
품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두 청동 부조를 보면 역시 조각은 기베르티 것이 나아 보인다. 기베르티의
작품은 입체감에 한계가 있는 부조임에도 원근법과 단축법이 훨씬 잘 드러난다. 전체적인 구성도 주제
를 향해 매끄럽게 이어진다. 이삭의 몸매도 현실감 있는 근육으로 표현했다. 또한 기베르티는 청동 주
물을 단 한 번에 주조했고 브루넬레스키는 여러 개를 주조해 접합했다. 브루넬레스키는 청동을 34킬로
그램 사용했고 기베르티는 27킬로그램을 썼다. 총 20개 패널을 넣어야 하는 문에 비싼 청동을 아낄
수 있어 기베르티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1401년 피렌체에서 열린 공모전은 결과
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낳은 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를 각각 건축과 조
각 분야로 나눠 피렌체가 자랑하는 최고의 예술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예수, 나폴레옹 군대에 총 맞아 죽다 _ 〈1808년 5월 3일〉을 그린 고야 이야기
파리 루브르 박물관,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더불어 세계 3대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박물관의 대표적인 작품은 <1808년 5월 3일>이다. 무기도 없는 맨손의 민중들을 향해
오른쪽의 군사들이 총을 겨누고 있다. 이미 총에 맞아 쓰러져 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바닥에 있다.
차례를 기다리는 것인지 공포에 질려 비참한 모습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칙칙하다. 어둠 속의 작은 등물 하나 덕분에 누가 누구인지 겨우 분간할 정도다. 그럼에도
좌측의 한 인물이 유난히 빛난다. 하얀 옷과 노란색 바지 때문인지를 몰라도 관람객의 눈길은 모두 그
남자에게 집중된다. 두 팔을 활짝 벌린 남자. 쏠 테면 쏴보라는 몸짓일까? 아니면 나는 아무런 무기도
없으니 살려달라는 것일까?
가로 3m가 넘는 작품이니 가까이서 보면 세부를 볼 수 있다. 이 하얀 옷의 남자 오른손이 매끄럽지
않다. 상처인지 검은색으로 움푹 패여 있다. 무표정한 이 사람의 포즈는 언뜻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과 닮았다. 오른손의 상처는 예수가 못 박히고 창에 찔렸을 때 생겼다는 다섯 가지 상처 오상 중
하나가 아닐까. 이 그림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작품이다. 고야는 로코코 양식에서 낭만주
의에 이르는 시기를 살다 간 스페인 화가다. 실제로 그의 예술 세계는 매우 상반된 이 두 양식이 혼재
되어 있다.
고야는 젊은 시절에는 출세를 지향해 각고의 노력 끝에 화가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스페인 궁정 화가가
됐다. 귀족들의 삶과 초상화를 화려하게 표현한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로코코 화풍의 전형을 잘 보여준
다. 그러나 1800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할 즈음 그의 예술 표현 방식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청력을 잃
기 시작하면서 남들과 교류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와 더불어 고야의 삶을 바꾼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왕조를 무너뜨린 프랑스는 공화국 체제로 들어섰다. 혼란 가운데 정권을 잡
은 나폴레옹은 다른 국가를 정복하며 전제주의 왕권을 무너뜨렸고, 혁명의 씨앗을 곳곳에 뿌리기 위해
전 유럽과 전쟁을 치렀다.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은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게 패해 제동이 걸렸다.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상륙을 포기하는 대신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무역 국가 영국의 타국과의 교류
를 막아서 장기간 포위하는 전략이다. 1806년 11월에 내려진 이 명령은 전 유럽에 공포되었다. 이때
포르투갈이 영국의 상품을 밀수입한다는 소식이 나폴레옹 귀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포르투갈에게 본보기를 보여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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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1807년,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진군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에서 포르투갈에 가려면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을 지나야 했다. 당시 스페인은 국왕 카를로스 4세를 비롯한 귀족들의 무능과 부패로 가난과 무
지 속에 피폐했다. 민중들은 새로운 세상을 바랐다. 희망이 필요했다. 왕과 귀족들을 무너뜨린 프랑스
가 그들의 롤 모델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전 유럽에 자유와 평등, 박애를 퍼뜨리는 나폴레옹을 구원자
라 생각해 스페인에 당도한 프랑스군을 민중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스페인 민중들은 순진했다. 나폴레옹은 또 다른 지배자였다. 포르투갈을 간단히 제압한 나폴레옹은 자
신의 형을 스페인 국왕에 임명했다. 프랑스 점령군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스페인 사람들을 무자비하
게 억눌렀다. 지배자만 바뀐 것이다. 물론 스페인 국민들만 속았던 것은 아니다. 베토벤조차 나폴레옹
을 인류의 영웅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교향곡을 ‘영웅’이라 이름 지어 헌정하려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
진 얘기다. 결국 ‘그도 역시 인간이었어’라며 교향곡 표지에서 ‘영웅’이란 글자를 지웠다. 괴테도 마찬
가지였다.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나폴레옹에 실망하고 분노했다.
1808년 5월 2일, 수도 마드리드에서 민중들은 프랑스군에 대항해 봉기했다. 무기도 변변찮고 훈련도
되지 않은 그들이 세계 최강 나폴레옹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다음 날은 5월 3일, 프랑스군은 봉기
에 참여했던 민중 300여 명을 색출해 학살을 자행했다. 멀리서 지켜봤는지, 듣기만 했는지, 여하간 고
야는 이때를 기록했다. 참상의 그날부터 바로 그림으로 옮겼던 것은 아니다. 6년간 이어진 프랑스의 스
페인 점령이 끝나고 스페인 국왕이 복귀했을 때, 과거의 기억을 생생히 떠올리며 대작을 완성했다. 이
것이 고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다.
영웅과 구원자라고 믿었던 나폴레옹으로부터 배신당한 스페인 민중을 위해 고야는 다른 주인공을 내세
웠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이 땅에 내려왔지만 십자가에서 희생된 예수처럼, 아무 이름 없고 평범했지
만 침략자에 대항하다가 처형된 민중을 구원자로 대변했다. 실제로 스페인 민중은 나폴레옹 군대에 맞
섰다. 절대적으로 힘이 약했기 때문에 나라 곳곳에서 소규모로 무장 저항을 했다. 스페인어 ‘전투’, 즉
게릴라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무고하게 희생된 힘없는 스페인 민중이 결국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 외에도 고야는 프랑스군의 만행에 희생된 민중을 연작 판화로 제작했다. 전쟁과 살육의 공포,
처참한 그들의 삶이 고야를 통해서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만들면서 고야는
철저히 사람들의 감정을 담아냈다. 당시 고야는 베토벤처럼 귓병에 걸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삶
속에서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어두운 세계를 그림으로 그렸다. 여기에서 비로소 낭만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고야의 위대한 작품 <1808년 5월 3일>은 이후 많은 화가들의 귀감이 되었다.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
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화가의 감정을 담기 시작했다. 그림으로 전달하는 ‘전쟁의 참혹함’이란
메시지도 이어졌다. 고야를 존경했던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라는 작품으로 고야를 오마주했다. 본인이 원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 조
카)에 의해 멕시코 황제를 떠맡았던 막시밀리안이 멕시코 군사들에 의해 처형된 사건을 그린 것이다.
배경이 밤에서 낮으로 바뀐 것을 빼고 고야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특이한 것은 실제로 막시밀리안
을 죽인 멕시코 군인들 대신 프랑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총을 쏘고 있다. 마네는 살육을 자행한 것
은 프랑스와 나폴레옹 3세라고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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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역시 고야의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군인
들 중 일부는 등을 돌리고 있다. 더불어 피카소는 그들의 모습을 사람이 아닌 마치 기계처럼 묘사했다.
격렬한 감정과 분노 없이 그저 입력된 명령에 따라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로봇의 행동 같다. 결국
이처럼 참혹한 현장을 고발한 그림은 이들을 조종하고 전쟁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자를 비판한
것일 수 있다.

17세기 루벤스의 그림 속에 등장한 조선인? _ 루벤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1983년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 놀라운 그림이 나왔다. 루벤스가 그린 전신 초상화인데 낙찰자는 미국
폴 게티 미술관이었다. 소묘로는 당시 최고가인 32만 파운드(한화로 약 5억 원). 그림 속 남자가 입은
옷과 쓰고 있는 모자가 조선 시대 철릭과 방건으로 밝혀져 <한복 입은 남자>라는 제목이 붙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지금은 벨기에 지방인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다. 훌
륭한 그림 솜씨와 더불어 화려한 언변과 여러 언어를 구사해 전 유럽에서 최고의 화가로 대접받았다.
여러 나라의 궁중 화가이면서 대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루벤스는 어떻게 당시 조선 사람
을 그릴 수 있었을까?
이탈리아 피렌체의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1573~1636)의 기행문이 그 단서다. 카를레티가 아시아
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기록한 내용이, 그의 사후인 1701년 『나의 세계 여행
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유럽에 최초로 한국을 알린 것으로 알려진 책인 『하멜 표류기』
가 출판된 때가 1668년이다. 정식으로 출판된 것이 늦었을 뿐이지 사실 조선을 제일 먼저 기록한 유
럽인은 카를레티였다.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간단히 언급하면서, 일본에 잡혀온 조선인 포로 다섯
명을 노예로 샀다고 기술했다. 그중 네 명은 인도에서 풀어주고 한 명만 이탈리아로 데려왔는데, ‘안토
니오’라는 이름을 쓰고 로마에 살고 있다고 적었다.
1993년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마을 알비에 ‘코레아’라는 성을 쓰는 집성촌을 취재한 다큐멘터리가 방
송되었다. 같은 해 작가 오세영이 쓴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발표되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모
두 카를레티의 기행문에서 착안해 취재와 소설로 이어진 것이다. 조선의 노예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기
독교로 개종하고 이탈리아 언어를 배웠다. 개성에서 장사하며 배운 회계 지식으로 베니스에서 수완을
인정받아 부유한 상인이 되었고, 이내 당대 최초의 화가인 루벤스에게 초상화를 의뢰할 정도로 지위가
상승했다. 앞서 소개한 다큐멘터리와 소설은 그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현재까지 ‘코레아’라는 성
을 쓰고 있다는 가설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남자는 루벤스가 1618년 발표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에 다시 등장한
다. 이번에는 소묘가 아니고 총 천연색 유화다. 훨씬 선명하게 묘사되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506~1552)는 스페인 선교사이자 가장 보수적인 예수회의 창립 멤버로 아시아 지역, 특히 인도와 일
본 선교에 적극적이었다. 이 때문에 하비에르는 성인으로 추앙되었고 그중에서도 선교사들의 수호성인
이 되었다. 국내에서도 예수회 학교인 서강대학교에는 하비에르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다.
루벤스는 하비에르 사망 이후인 1618년 이 그림을 완성했다. 하비에르가 선교를 하면서 행한 숱한 기
적을 찬양한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고 각종 우상을 파괴하며 많은 이들을 하느님의 품으로 전도하는
장면을 담았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중앙에 서 있는 두 사람이 특이하다. 붉은 모자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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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남미의 전통 복장이다. 그 옆에 앞서 소묘에서 보았던 동양인 남자가 돋보인다. 그러니까 유럽의 백인
들뿐만 아니라 동양과 신대륙 모든 민족이 하비에르의 설교에 감화한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동양의
대표로 그려진 사람이 조선에서 온 안토니오일까?
유독 한국에서만 이 그림 속의 동양인 때문에 논란이 일었다. 과연 이 사람이 조선인이냐, 이 옷차림
이 전통적인 조선 복식, 즉 철릭과 방건이 맞는지 끊임없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폴 게티 미술관에
서는 ‘한복 입은’이라고 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오히려 ‘아니다’라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역사학자와
미술사학자는 물론 복식 전문가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는다. 조선인이 아니라는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방건은 각진 모양이지만 그림 속 모자는 형태가 둥글다’, ‘철릭 또한 길이가 중국식에 가깝다는 반론이
다. 무엇보다 루벤스가 동양을 대표하는 인물로 당시 유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중국인을 제치고 유럽
에 겨우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조선인 ’안토니오‘를 수소문해 그렸을 가능성이 희박했다. 루벤스가 로
마에 머물렀던 시기는 매우 바빴던 때로 생소한 동양인의 초상화를 그렸을 이유도 별로 없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온 ’안토니오‘가 조선 전통 복장을 지구 반대편까지 오는 10여 년 동안 깨끗하게 보관한
것도 의문스럽다.
한국 복식 전문가 윤지원 박사는 “모든 문화가 그렇지만 복식사에서 ‘고유’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며 “철릭도 원에서 들어왔지만 한국식으로 디테일이 변했다. 루벤스의 그림을 보면 소재나 실루
엣 등에서 서구적인 것이 나타난다”고 한다. 즉, 지금의 시각과 남겨진 자료만으로 그림과 비교해서
어떤 사실을 확정지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루벤스가 가끔 보던 동양인의 옷차림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감해 그렸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안토니오’라는 조선인 노예가 루벤스 앞에 모델로 서기 전, 자신이
고향에서 입던 옷을 기억을 더듬어 새로 만들어 입었을 수도 있다. 여하간 이러한 논란 자체가 서양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루벤스를 통해 회자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경주의 괘릉을 지키고 있는 석상의 모델은 아라비아 사람이다. 우리가 상상 이상으로 전 세계는 오래
전부터 교류했다. 찾아보면 더 많은 조선인, 신라, 고려인들이 서양 미술 속에 등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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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3 서양 미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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