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질문 빈곤 사회

by Casey,Riley 2022. 1. 31.
반응형

강남순 지음 / 행성B
정치ㆍ철학ㆍ종교ㆍ인권 등 다양한 인문학 영역에서 연구해온 강남순 교수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자 독자들을 사유의 세계로 초대하는 초대장이다. 저자는 정치, 언론, 종교를 향해 비판적
시선으로 뜨거운 질문을 건넨다. 또한 다양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 정답처럼 굳어진 관행, 함께 살
아가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며 독자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도록 안내한
다.

질문 빈곤 사회
강남순 지음

▣ Short Summary
인간은 왜 질문을 하는가. 질문하기는 인간의 삶을 다양한 측면에서 개선하고 발전시킨다. 인간은 질
문을 통해서 불을 만들고, 농경 기구도 만들어냈다. 질문하기를 통해서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물론, 정
신세계에서의 발전도 이루어냈다. 인류 문명의 모든 것은 바로 인간이 호기심을 가지고, 그 호기심의
불꽃을 지속적으로 지피면서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은 결과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라고 했다. 즉 자신은 누군가가 ‘정신적 출산’을 하도록 돕는 사람이지, 대
신 아이를 낳아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로부터 질문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확
신했던 것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하면서 새로운 질문과 마주해 서서히 스스로의 정신적 아이를 품게
되고 언젠가 그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질문하기를 통해서 새로운 앎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도와주는
‘산파’역할을 하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불경함’ 그리고 ‘청년들을 타락시킴’이라는 두 가지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맞는다.
한국은 질문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다. 주입식 교육과 그에 따른 입시제도는 질문을 봉쇄
하는 문화를 지속시키고 강화한다. 나아가 가족, 친척, 직장 등 도처에서 작동되는 ‘장유유서’의 변형
된 관계관과 가치관은 가정, 학교, 직장은 물론 사람 간의 위계주의적 관계를 지배하고 있다. 위계적
관계 설정에서 질문하기는 덕목이 아닌 지양해야 할 파괴적 행위다. 위계주의가 기본적 관계구조인 한
국 사회는 결국 ‘질문 빈곤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질문하기를 억누르는 문화에서는 질문하기 자체가
어렵고 무엇보다도 올바른 질문, ‘좋은 질문’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실천하기 어렵다.
경제적으로 또는 테크놀로지에 있어서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질문하기’로 시작되는
인문학적 측면이나 인간으로서의 권리 확장이라는 사회정치적 제도 측면에서, 한국은 여전히 그 후진
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질문 후진국’이다. 질문 후진국의 모습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면 국회
청문회장, 국정 감사장, 기자회견장, 선정적 표제를 지닌 신문기사들, 갖가지 종교 단체의 총회장 등에
서 오가는 질문의 내용과 방식을 관찰해보면 된다.
비판적 사유 없이 주어진 대로 현상유지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방치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뿐만이 아니라, 타자의 삶까지 파괴하는 위험성에 노출된다. 난민 혐오, 성소수자 혐오, 가난한 사람,
저학력자, 택배 노동자, 비정규직, 장애인, 지방대 등 갖가지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한국

-2-

질문 빈곤 사회

문화는 결국 비판적 사유의 부재, 질문의 부재, 그리고 질문의 빈곤이 가져온 ‘질병’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글들은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일상 세계에서 마주하는 사건들, 개인들,
무수한 얼굴들을 바라보는 다층적 시선으로 던지는 나의 질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질문들이 하
나의 ‘초대장’이 되어,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각기 다른 또 다른 질문으로 탄생되기를 바란다. 동물적
‘생존’을 넘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질문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질문한다, 고
로 존재한다.”

▣ 차례
프롤로그 _ 질문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1부 _ 권력과 언론에 물음 묻기: 비판적 질문을 찾아서
일기장과 권력의 야만성 / 정치 기독교 미디어, 그 파괴적 삼각 동맹
‘거짓과 증오 중독’이라는 이름의 병 / 탈진실의 시대, 내면적 전체주의의 덫
제2의 신 미디어, 도구인가 무기인가 / 세 차원의 생명, 보호 책임을 지닌 이들
질문의 예술, ‘좋은’ 질문하기는 왜 중요한가
2부 _ 타자의 얼굴에 물음 묻기: 당신은 그에게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수단의 나라에서 목적의 나라로
‘트럼프 멘탈리티’, 성숙성과 용기로 저항하기 / 세 종류의 사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나이 집착 사회’, 그 위험성과 후진성 / “나는 숨 쉴 수 없다” / 나 속의 인식론적 사각지대
키스의 부재로 인한 휴머니티의 위기 / 그대는 어디에서 삶의 지혜를 구하는가
3부 _ 관행과 대안에 물음 묻기: 한국 사회에 필요한 불편한 배움
‘즉각적 대안’의 위험성, 여정으로서의 대안 찾기 / ‘임신 출산 양육’이라는 사회정치적 사건
긴즈버그의 유산, 한국 사회에 주는 의미 / 능력위주사회의 위험 /‘반지성주의’라는 이름의 바이러스
갑질, 위계주의, 법인카드의 대학 / 불편함을 거부하는 교육, 미래는 없다
4부 _ 존재와 혐오에 물음 묻기: 우리는 이웃을 환대하는가
‘커밍아웃’, 살아있는 생물체로서의 언어 / 기독교, 예수의 흔적은 어디 있는가
죽음의 절벽으로 몰리는 이들 / 당신은 이성애 합법화를 찬성하십니까 / 트랜스젠더도 인간이다
혐오의 평범성, 함께 저항하고 넘어서야 / 장애인은 ‘이슈’가 아니라 ‘인간’이다
탈가족주의, 새로운 가족의 탄생 / 혐오의 정치에서 환대의 정치로
지구의 공동 소유권자, 난민은 동료 인간이다 / 정의는 기다리지 않는다
5부 _ 희망과 생명에 물음 묻기: 함께-잘-살아감에 대하여
‘바이든-해리스’의 인문학적 가치, 다양성의 존중 / 네 개의 국적을 가진 사람
나는 행복한가, 인간의 권리로서의 행복 추구 / 뉴노멀, 되찾아야 하는 다섯 가지 가치
‘포장 전시하는 삶’이라는 이름의 병 / 위기 시대, ‘연민과 연대의 정치학’이 절실한 이유
살아남은 자들의 책임 / 희망이란 무엇인가
고독 연습 / 살아있음의 과제 / 새로운 탄생에의 초대

-3-

질문 빈곤 사회

질문 빈곤 사회
강남순 지음

1부 _ 권력과 언론에 물음 묻기: 비판적 질문을 찾아서
정치ㆍ기독교ㆍ미디어, 그 파괴적 삼각 동맹
정치ㆍ기독교ㆍ미디어의 개성적 동맹: “드디어 문재인은 이미 벌써 하나님이 폐기처분했어요. 지금 대
한민국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냐. OOO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 (중략) 하나님 꼼짝 마, 하
나님.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뉴시스, 2019. 12. 09.)
A목사의 발언이다. 그는 후에 “‘하나님 까불지 마. 나한테 죽어’라는 말의 본심은 ‘문재인 저 OO 빨리
죽여 달라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A목사는 ‘증오의 레토릭’을 애국 행동으로 포장한다. ‘세계기독청’
이 완성되어 세계 각처에서 온 사람들의 회비와 면세점 수입까지 계산하면 한 달에 ‘1조 원’이 생긴다
고 하는 A목사는 능란하고 기만적인 기독교 사업가다. 8.15광복절 집회에 오지 않으면 “인간으로 살
필요가 없다”며 “주민등록증 회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혐오와 공포, 이 두 가지가 바로 A목사의
레토릭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A목사’는 단지 예외적 존재인가. 유감스럽게도 나는 도처에서 무수한 ‘A목사들’을 본다. 예수
를 내세우면서 자본주의적 욕망을 펼치는 사업을 하는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두 가지, 즉 권력과 물질
적 이득이다. ‘A 목사들’과 같이 대중을 선동하는 기독교 사업가는 스스로 생명력을 지니고 자생할 수
없다. 기생해야 하는 다른 권력은 바로 극우 정치와 미디어다.
극우 정치ㆍ기독교ㆍ미디어의 기생적 동맹을 드러내는 장면을 보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A목사가
주도하는 집회에 등장해서 “A목사님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만세!”라고 외쳤다. 이어 법무부 장관, 국
무총리 그리고 대통령 권한 대행이라는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해 온 황교안이 연단에 등장한다. 환호
하는 청중 앞에서 세 사람은 미소를 띠며 사진을 찍는다. 극우 기독교 사업가와 정치인이 각자의 권력
확장을 위해 서로에게 기생하는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 장면은, 극우 미디어를 통해서 선동적
제목을 붙인 기사로 확산된다. 이렇게 해서 각각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진실을 왜곡하고 혐오와 공포
의 정치를 확산시키는, 극우 정치ㆍ기독교ㆍ미디어의 그 ‘파괴적 삼각동맹’이 완성된다.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나치가 파괴했던 한 유대인 회당을 방문했다. 교황은 그 자리에서 “독
일과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던 20세기에, 신이교주의에서 태동한 광기적 인종차별주의이
데올로기가 유럽의 유대인들을 몰살하는 정권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치 치하에서
벌어진 ‘인류에 대한 범죄’를 ‘신이교주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교황의 말은 당시 히틀러 치하의 정치와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가 맺은 파괴적 동맹 관계를 보지 못하게 한다. 마치 A목사를 ‘이단’으로 치부
하면 한국 기독교의 복합적 문제들이 가려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 확장을 위해 ‘적극적 기독교’라는 이름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전개하고, 1936
년 독일의 국가 교회를 탄생시켰다. 성서의 자리에 《나의 투쟁》이, 십자가의 자리에는 꺾어진 십자가
(하켄크로이츠)인 ‘나치 문양’이 대체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나는 독일 민족과 국가의 지도자인

-4-

질문 빈곤 사회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하고 복종할 것을 맹세합니다. 신이여, 도와주소서”라는 선서를 했다. 독일의
기독교인들은 히틀러를 지지하는 다수의 ‘적극적 기독교’ 교인들, 그리고 히틀러에 저항하면서 본회퍼
를 중심으로 구성된 소수의 ‘고백교회’ 교인들로 이분화되었다. 히틀러는 다수 기독교인의 협조와 미디
어를 통한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서 권력 욕망을 성취했다. 끔찍한 ‘인류에 대한 범죄’가 히틀러라는 한
개인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것이라고 보면 안 되는 이유이다.
“기독교인들은 나를 사랑한다.” 도널드 트럼프의 말이다. 트럼프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다
면, 나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조차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시시때때로 신과 성서를
들먹이고, 교회 앞에서 성서를 손에 들고서 기자들이 사진을 찍게 하는 연기를 한다. 자신에게 표를
주었던 극우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이 성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
는 이미지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다양한 미디어 장치가 없었다면 트럼프의 이러한 가식적 이미지 메이
킹은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히틀러와 트럼프가 사용한 미디어와의 기생적 동맹은 매우 유사하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을 통제하
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언론’이라는 개념을 수시로 차용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을 장악
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한다. 히틀러는 ‘국가 대중계몽선전부’를 만들어서 요셉 괴벨스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괴벨스는 이 부처를 통해서 신문, 잡지, 책, 공공 집회, 예술, 음악, 영화, 라디오 등을 통제
하고 모든 미디어를 나치 정권의 권력 확장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트럼프도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을 통해 자신에게 불리한 언론을 불신하도록 선동하고, 유리한 것만을 부각시켰다.
권력 욕망에 찬 정치인과 종교인의 파괴적 연합: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에 앞장선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여성 혐오, 난민 혐오, 성소수자 혐오, 타 종교 혐오, 빨갱이 혐오 등의 혐오정치를 기반
으로 극우 보수 정치인들과 공동 전선에 선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은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
기에 힘을 모았고, 지금은 문 대통령을 ‘종북 빨갱이’라며 탄핵을 외쳐댄다. 히틀러는 유대인, 외국인,
성소수자,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를 무기로 삼았다. 혐오의 대상을 ‘위협적 존재’로 부각시키는 전략
은 매우 유사하다. 위협적 존재를 ‘공동의 적’으로 삼은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히틀러에게 그리고 트
럼프에게 지지를 모아준다. 지지세력을 결집하기 위해서 혐오 가치를 극대화하고, 그 혐오의 대상을
‘공동의 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신과 성서를 소환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A목사’로 상징되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 역시 신과 성서의 이름으로 다양한 혐오를 먹고 산다. “중국이
기독교를 박해해 하나님이 화가 나서 전염병으로 중국을 심판한다” 또는 “차별금지법 때문에 하나님이
한국에 세균으로 벌을 내린다”라고 설교하는 목회자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은 A목사와 크게 다르지 않
다. 인류의 역사에서 야욕에 찬 정치인들은 언제나 기독교를 이용한다. 그리고 비판적 성찰이 부재한
반지성주의에 빠진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정치인들과 동맹을 맺은 기독교 지도자의 선동에 넘어가서 이
용당한다.
‘A목사’라는 이름은 한국 보수 기독교인들의 문제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질병을 드러내는 표면적 예일 뿐이다. A목사를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A목사와 함께했던 정치인
들이나 정당은 선 긋기를 하고, ‘문제가 있는 개인’으로 돌린다. A목사가 소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백석대신)는 2019년 8월 30일, A목사의 “면직 및 제명 공고”를 냈다. A목사의 신학적 견해와 사상이
정통 기독교에서 벗어나서 교단으로부터 면직하고 제명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산에 A목사의 교회
가 시발점이 되자 국민의 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선 긋기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A목사식

-5-

질문 빈곤 사회

의 기독교, 그와 동맹적 관계를 맺는 정치인들 그리고 미디어의 파괴적 삼각 동맹이 왜 등장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원인을 보지 못하게 한다.
모든 개혁은 상호의존적: 도대체 한국 사회 전반에 어떠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가. 비판적 ‘물음 묻
기’가 부재한 공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회 구성원이 될 때, 비판적 사유를 작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
다. 비판적 사유의 부재, 물음 묻기를 억누르는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의 사유 기능은 정지된다. 그들은
다만 ‘선동’될 뿐이다.
‘자유’라는 동전의 이면은 ‘책임’이다. 종교적 자유란 이름으로 공공세계에서 무책임하게 행동하며 사회
적 해를 끼칠 때, 그 종교는 개인과 사회에 파괴적이다. 개인의 종교적ㆍ정치적 자유는 공동선을 해치
거나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최소한의 책임성이 수반될 때, 비로소 존중받을 수 있다. 기독교 사
업가의 선동에 ‘아멘’을 부르짖는 대중들은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지 못한다. 이미 사유 기능을 마비시
키는 종교적 마약을 흡입했기 때문이다.
교육ㆍ정치ㆍ종교ㆍ미디어 등 특정한 한 부문의 개혁은 사회 전체 개혁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결코
충분조건이 아니다. 각 영역이 총체적으로 변화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 각각의 권력
확장과 이득의 극대화를 위해 뭉친 파괴적 삼각 동맹을 끊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 동맹 관계가 지속될
때 종교는 마약이 되고 미신이 되며, 그 종교가 위치한 사회에 성숙한 민주정치와 미디어가 뿌리내리
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개혁은 상호의존적’임을 기억하자.

2부 _ 타자의 얼굴에 물음 묻기: 당신은 그에게 어떤 사람인가
세 종류의 사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직업이 무엇이든, 어떠한 정황에서 살아가든 사람은 대부분 세 종류의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매니퓰
레이터, 매니저 그리고 리더다. 코로나19 사태가 불거지면서, 미디어에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 두 단어
가 있다. 바로 틀린 정보와 허위 정보다. 틀린 정보란 잘못된 정보다. 반면 허위 정보는 의도적으로 사
실과 진실을 왜곡시킨 정보다. 이 둘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 의도와 결과는 매우 다르다.
매니퓰레이터, 권력에의 집착자: 9시에 시작하는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내가 그 회의가
10시에 시작하는 줄 알고, 회의 시간을 묻는 A에게 10시라고 한다. 내가 준 틀린 정보 때문에 A는 회
의를 놓치게 되어 불이익을 당하고 만다. 이런 경우 A에게 틀린 정보를 준 나는 미안해하며 사과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A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고의로 10시라고 알려준다. 의도적으로 허위 정보를 줌
으로써 동료 사이를 이간질하고, 공동체에서 왕따시키고, 불신감을 조장하고 급기야는 사회적 생명까
지 파괴시킨다. 전형적인 매니퓰레이터의 모습이다. 매니퓰레이터는 이처럼 ‘반쪽 사실’을 가지고 ‘전
체 사실’로 왜곡하고, 후에 진실과 사실이 드러나도 결코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법이 없다. 매니
퓰레이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집착’과 ‘일그러진 인간성’이다. 개인뿐만이 아니다. 특정
한 사회, 종교, 정치집단, 또는 미디어도 매니퓰레이터의 역할을 한다.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로 캠페인을 벌일 때, 노골적으로 매니퓰레이터의 역할을 한 것은 <폭스 뉴스>
와 티파티라는 정치집단이었다. 이들은 오바마를 ‘동물’그리고 ‘히틀러’로까지 비유했다. 오바마를 악마
화하는 것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오바마가 이슬람교도라든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등의 허위 정보를 확산시켰다. 물론 이들이 오바마가 기독교인이며, 미국에서 태어났다

-6-

질문 빈곤 사회

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매니퓰레이터의 특징은 진실과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왜곡한다는 것이
다. 매니퓰레이터들은 다양한 관계들을 파괴하는 사회적 바이러스와 같다.
매니저, 현상 유지자: ‘매니저’는 누구인가. 매니저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현재 현상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적 물음을 묻지 않는다. 매니저의 주요 기능은 현상 유지다. 물론 한 공동체, 집단 또는 사회에서
이러한 매니저 같은 역할은 필요하다. 현상을 유지해야 하는 차원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렇게 매니저의 역할만 하는 이들만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현실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에 현상
유지만이 아닌 변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사회에 매니퓰레이터나 매니저만 존재한다면
여러 면에서 퇴보하게 된다.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는 매니저뿐
만이 아니라, 매니퓰레이터의 역할을 하는 개인과 집단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
에 이러한 매니퓰레이터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리더가 필요한 이유다.
지도자,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설득의 예술가: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리더’는 재개념화된 리더다. 흔
히 생각하듯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이가 아니다. 리더는 학력의 고하 또는 권력
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권력의 중심부만이 아니라, 주변부에 있는 이들까지 동시적으로 본다. 아이들 세계에서조차도
나이, 성별, 가정 배경, 육체적 힘 등에 따라 권력 관계가 작동한다. 리더란 중심과 주변을 늘 함께 보
면서 주변부까지 포용하는 사람이다. 둘째, 리더란 관계가 깨어지고 왜곡될 때, 사실과 진실을 토대로
그 관계를 올바르게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셋째, 리더의 가장 중요한 지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귀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정의에의 예민성이다. 넷째, 리더는 현재
만이 아니라 늘 미래를 늘 기억하는 이다. 지금보다 나은 관계,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생각하면서 그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억을 실천하고자 한다. 다섯째, 진정한 리더는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주변 사람
들이 그 목표를 추구하도록 ‘설득의 예술’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리더란 끊임없는 성찰, 자기
학습 그리고 타자들과 열린 대화를 하면서 리더로 만들어진다.
조작과 왜곡된 정보로 한 사람의 사회적 생명을 박탈하고, 관계가 깨지게 만드는 개인, 집단, 미디어,
정치인, 종교인 등이 증가하는 사회에서 희망은 사라진다. 한국 사회에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진정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사회 곳곳에 진정한 리더들이 늘어갈 때, 매니퓰레이터
가 들어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게 된다. 진정한 리더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관계들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게, 민주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우리의 과제다.

3부 _ 관행과 대안에 물음 묻기: 한국 사회에 필요한 불편한 배움
불편함을 거부하는 교육, 미래는 없다
배움은 ‘불편함’의 경험으로부터 시작: 매 학기 강의가 시작되는 첫날, 나는 학생들에게 ‘배움이란 무엇
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다. 인문학적 배움은 여러 가지 정보를 습득하고 암기하거나, 또는 선생이
지닌 지식을 그대로 학생들이 전수받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데 필요한
우선적 과정은 ‘불편함의 경험’이다. ‘비판적 사유’를 주요 교육목적으로 하는 인문학적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의 마음이 즐겁고 편하기만 하다면, 선생이나 학생 모두 실패한 것이라고 나는 수업 시간마다
강조한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면서, “닥터 강, 오늘 수업 중에 내 마음이 심히 불편했
습니다”라고 내게 말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그 말은 나에게 ‘오늘 많이 배웠다’는 고마움을 표현하

-7-

질문 빈곤 사회

는 ‘선생-학생 사이의 암호’가 되곤 한다.
배움이란 새로운 정보의 습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배움이란 자신의 고유한 관점이 형성되고, 그러한
관점이 내가 타자를 보는 방법, 인생관, 세계관 등 내 삶의 방향성을 규정할 수 있는 가치관을 구성하
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 분야의 수업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즐겁고 마음 편한 경
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 드러나고 있는 현상들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받아
들이게 하는 수업을 통해서는 새로운 배움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탈자연화와 뿌리 물음의 중요성: 비판적 사유를 동반하는 새로운 배움에 필요한 몇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 첫째, ‘탈자연화’의 과정이다. 변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사
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과정이다. 둘째, 이러한 탈자연화가 가능하려면 ‘뿌리 물
음’이 필요하다. ‘뿌리 물음’이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물음표를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뿌리 물
음은 어떤 관습이나 현상이 애초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 라는 근원으로 돌아가서 생각하게 만드는 질
문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차별과 불공평이 많은 이의 삶을 파괴하고 깨뜨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
눈에 보이는 차별과 배제의 현실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고 어떻게 변화
가 가능한가, 라는 근원적 ‘뿌리 물음’을 묻는 것은 인문학적 배움의 책임이고 과제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의 평등, 다양한 형태의 정의를 확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사회, 문화, 관습과 전통 등이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과제’로서 다가온다. 전통들이 지니고 있는 다층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책임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다. 인문학 분야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학생들이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변화의 주
체가 되도록 교육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현상들에 대하여 ‘왜’를 묻게 하고,
대안적 세계를 상상하게 함으로써 현실의 다양한 ‘문제’를 ‘문제로 보기 시작한 것’에서 새로운 배움,
새로운 변화의 첫걸음을 내딛게 할 수 있다.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있는데도 그것을 전혀 문제로 보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가 ‘모든’ 이에게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로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를
문제로 보게 하는 배움은 ‘불편한’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학생들을 즐겁게만 하는 인문
학 수업시간에, 진정한 배움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4부 _ 존재와 혐오에 물음 묻기: 우리는 이웃을 환대하는가
혐오의 평범성, 함께 저항하고 넘어서야
고백을 해야겠다. 나는 성소수자를 혐오했던 사람이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대학원 수업의 자기소개
시간에 자신을 ‘게이’라고 소개하는 남자 학생이 있었다. 게이라니! 충격이었다. 나는 속으로 저 ‘이상
한 사람’과는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오기 전 나는 한국이나 독일에서 성
소수자를 만난 적도,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물론 그 당시 내가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혐오란 누군가를 열등하고, 비정상이며, 위험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출
발하는 것임을 배우게 되었다. 되돌아보니 나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성소수자를 혐오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휴식 시간에 그가 “하이, 남순” 하고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내가 성소수자 혐오를 했던
것처럼 그가 ‘외국인 혐오자’였다면 내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비로소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학기를 함께 보내면서 나는 그가 나와 똑같은 평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
게 되었다. 너무나 당연한 이 보편 진리를 내가 그제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성적 지향에 대

-8-

질문 빈곤 사회

한 복잡한 이론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과의 만남이 내 속에 은닉되어 있던 혐오
를 끄집어내 폐기하도록 만들었다.
기념일로 기억되는 주변부 사람들: 우리 사회에는 기념일들이 있다. 어린이날, 여성의 날, 노인의 날,
장애인의 날,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등이다. 이렇게 지정된 날에 호명되는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사회의 주변인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특별하게 호명되고 기억되어야 하는 이유다. 중심부에 있는
이들은 굳이 특별한 관심을 받을 필요가 없다. ‘어린이’가 아닌 어른, ‘여성’이 아닌 남성, ‘장애인’이 아
닌 비장애인, ‘성소수자’가 아닌 이성애자 같은 이들은 중심부에 있기에 혐오, 소외, 차별, 배제를 경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부에 있는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된다.
혐오는 자기 인간됨의 파괴: 흔히 혐오는 노골적인 양태로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혐오는 자신도 모르게 은밀하게 작동한다. 은밀한 혐오 역시 노골적인 혐오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차별
과 배제의 기능을 한다. 혐오는 특정한 사람들이 열등하고, 비정상적이며, 위험하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렇기에 ‘악하고 나쁜’ 사람들만 타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혐오하고, 그 혐오를 확산하곤 한다. 혐오의 평범성이다.
그런데 누군가를 혐오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타자에 대한 혐오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인간됨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 타자가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성소수자든 그들에 대한 혐오
는 자신을 먼저 파괴한다. 2021년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의 주제는 “함께 저항하고, 지지하
고 치유하기”다. 우선 나ㆍ우리 안의 혐오에 ‘저항’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를 ‘지지’하고, 혐오로 인해 만들어진 상처는 물론 나ㆍ우리 속의 상처를 ‘함께’ ‘치유’해야 함을 상기해
야 한다.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든 모든 인간은 존엄성과 평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혐오의 정치에서 환대의 정치로
외국인 혐오, 국가적 후진성: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019년 6월 19일, 이주 노동자에게 내국인과
동일한 임금수준을 보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임금수준을 차등화하는 입법에 나서겠다고 했다. 그 외
국인 노동자들이 한국 국가에 기여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외국인 혐오’의 전형이다.
나는 지금도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일하며 살고 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외국인이 되어
독일로 유학을 갔다. 그 당시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독일에 세금은 물론이고 아무런 ‘기여’ 도 하
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독일 내국인과 동등하게 각종 혜택을 받았다.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학비도
전혀 내지 않았고 건강보험 혜택은 물론 주거 보조비와 아이 양육비까지 받았다. 내가 만났던 독일의
한 기독교인은 예수의 이웃사랑 가르침을 현대에 실천할 수 있는 방식은, 국가의 사회보장제도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이웃사랑은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국가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제도적 평
등성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첫 외국인으로서의 삶을 경험한 이후 여러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나에게는 ‘외국
인’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그 나라의 선진성과 후진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나
라가 외국인에게 개인적ㆍ제도적ㆍ국가적 환대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보장하는가를 보는 것이
다. 혐오와 적대의 정치가 포용과 환대의 정치를 압도할 때, 그 사회가 아무리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
다 해도 내게는 후진국이다. 나는 한국, 독일, 미국, 영국 등 네 개의 각기 다른 나라에서 살아 보았다.

-9-

질문 빈곤 사회

그런데 네 나라 중에서 가장 후진성을 보이는 것이 내가 태어난 한국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낯선 사람’에 대한 환대의 종교적 의미: 모든 종류의 혐오는 이분법적 사유방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두
축을 만들어 우월과 열등을 설정하면 혐오의 씨는 그 뿌리를 내린다. 황교안 대표는 내국인과 외국인
을 이분법적 대척점에 세워놓는다. 그리고 내국인은 우월하고 기여하는 존재로, 외국인은 아무런 기여
를 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라는 왜곡된 가치판단을 적용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외국인은 문화적
ㆍ종교적ㆍ인종적 상이성 때문에 내국인의 삶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라는 생각을 의식적ㆍ
무의식적으로 작동시킨다.
황교안 대표의 의식 속에 등장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어떤 모습일까. 필경 피부색이 하얗고 기독교 문
화에서 온 ‘백인’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비기독교 국가인 소위 제3세계 나라에서 온 ‘갈색인’
일 것이다. 황교안 대표가 자기 발언의 복합적인 함의를 인식하지 못했다 해도,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는 그의 이 발언에서 나는 외국인 혐오, 인종 혐오, 계층 혐오 그리고 종교 혐오를 동시에 느낀다. 제
주도 예멘 난민들을 향한 기독교인들의 혐오는 이러한 혐오정치의 구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데 ‘외국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3개의 종교를 일컬어 “아브라함 종
교들”이라고 부른다. 이 세 종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간주하며, 아브라함을 기점으로 펼
쳐진다. 흥미롭게도 성서의 신은 정확한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
한다. 익숙한 고향을 떠나 ‘주인ㆍ내국인’으로의 삶을 벗어나 ‘손님ㆍ외국인’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아
브라함은 비로소 이름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며 ‘믿음의 조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외
국인으로의 삶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인ㆍ내국인’의 환대이다. 그 환대
는 개인적 환대이기도 하고, 국가적ㆍ제도적 환대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무조건적 환대’를 강조한다. “자신의 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우리에게 속한 사람처럼
대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외국인들을 사랑하라(레위기 19:33-34)”고 하며, “아무런 조
건 없이 낯선 이들에게 환대를 베풀라(로마서 12:13)”고 한다.
익숙한 고향을 떠나 낯선 타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도착한 곳에서 자신을 환대로 맞아주는 사람들의 배려이다. 신이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외국인’으로서의 삶을 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성서에 있다는 것은, 어쩌면 종교에서 환대가 가장 중
요한, 핵심적인 실천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세 종교에서 소위 ‘아
브라함적 환대’는 매우 중요한 실천적ㆍ종교적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보이는 모습은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우리 모두 내국인이며 외국인: ‘내국인-외국인’의 경계는 절대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한국이라는
지리적 영토를 벗어나자마자, 모든 ‘내국인’들은 ‘외국인’으로 살아야 한다. 즉, 도착지 내국인들의 환
대가 절실하게 필요한 삶에 들어서는 것이다. 더구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국가적 경계는 이전과 같
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초경계적 삶, 초국가적 삶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내국인이면서 외국인이기도 하고, 외국인이면서 내국인적 삶을 사는 ‘디아스포라적 의식’을 체
현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점에서 21세기의 사회는 ‘낯선 사람들’, 즉 외국인에 대한 환대를 어떻게 개
인적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실천하는가에 따라 그 성숙성이 규정될 수 있다. 내국인에 대한 ‘환대’가 외
국인에 대한 ‘적대’에 의해서 작동될 때, 그 메커니즘은 인류 역사 속에서 타자에 대한 극도의 폭력과

- 10 -

질문 빈곤 사회

살상을 일으켜왔다. 이것은 ‘모든 이’의 자유와 평등을 주요한 가치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
되는 ‘반민주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정신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반기독교적’ 행위이다.
한 사회의 ‘낯선 사람들’은 외국인만이 아니다. 성소수자, 장애인, 여성, 아이 등 주류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주류적 관점에서 보면 ‘낯선 사람들’이다. 모든 종류의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서 반대해야 할 기
독교인들이, 오히려 혐오와 차별을 마치 기독교적 가치인 것처럼 강화하고 확산하고 있다. 혐오정치가
한국 사회의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에게서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증명하는 도구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혐오정치의 위험성은 혐오자들 자신의 인간됨을 파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혐오 대상들에게 지독
한 ‘존재적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이름으로 예수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혐오정
치의 길에서 돌아 나와 ‘환대의 정치’로 전환하기 바란다. 예수는 ‘혐오’가 아니라, ‘환대’를 가르쳤으며,
그 환대의 원을 확장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기독인들의 중요한 과제이다. 뿐만 아니라 성숙한 민
주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임을 상기해야 한다.

5부 _ 희망과 생명에 물음 묻기: 함께-잘-살아감에 대하여
나는 행복한가, 인간의 권리로서의 행복 추구
죽음의 인식과 행복에의 갈망: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존재다. 그리
고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오직 인
간만이 죽는다, 식물과 동물은 소멸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이 유
한한 삶에서 무엇을 소중한 가치로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게
되면서, 그 죽는다는 사실이 주는 두려움을 넘어서고자 인간은 행복과 의미를 추구하려는 갈망을 갖게
된다. 자신의 유한성과 죽음에 대해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관계에서의 불필요한 집착, 그럴듯해 보
이는 그러나 허울뿐인 명예와 권력에의 집착, 그리고 진실이 부재한 가식적 관계의 감옥으로부터 자신
을 끄집어내게 하기 때문이다.
이 죽음에의 인식이 인류에 철학과 종교를 태어나게 했다. 철학은 ‘행복의 추구’, 종교는 ‘구원의 추구’
라고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떠한 개념을 사용하든 죽음을 향해 가는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원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행복의 추구는 모
든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이것은 유엔이 “행복의 날”을 제정하면서 강조한 것이다.
유엔은 2012년 6월 28일 총회에서 <국제 행복의 날>의 제정을 결의했다. 이 총회에서는 매년 3월 20
일을 <국제 행복의 날>로 지정할 것을 결의했다. 유엔 결의에 따라서 2013년 3월 20일, 첫 번째 ‘국
제 행복의 날’이 시작된다. 유엔의 행복의 날 문서를 보면 “행복 추구는 인간의 근원적인 권리이며 목
적”이라는 선언이 나온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라는 것이다.
유엔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데 요구되는 기본적인 열일곱 가지 목표를 제시한다. 이 열일곱
가지 목표는 기아와 빈곤의 퇴치, 깨끗한 물과 위생, 건강과 복지, 안정된 직업과 경제 성장, 산업 혁
신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지속 가능한 도시와 공동체, 책임적 소비와 생산, 기후 변화 같은 생태 위
기를 넘어서기 위한 방안은 물론 젠더 평등, 그리고 평화와 정의로운 제도들 등에 관한 것이다. 열일
곱 가지 목표의 범주를 크게 나누어 보자면, 세 차원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육체적 삶, 사회 제도적
삶 그리고 정신적 삶이다. 결국 행복한 삶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이 세 차원의 조건들을 개선하고 제도
적으로 보장하는 정황에서 그 가능성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다. 이 열일곱 가지의 목표는 개인들이 행

- 11 -

질문 빈곤 사회

복한 삶을 모색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토대다. 즉,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과의 관계’: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는 각 개인이 지닌 인생관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행복의 추구는 사치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라는 사실이다.
행복의 추구에서 필요한 것은 두 가지 차원, 즉 보편적 차원과 개별성의 차원이 있다. 유엔이 제시한
열일곱 가지 목표 내용은 보편적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 즉, 인간이면 누구나 그러한 보편적인 기본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데 개별성의 차원은 개인의 구체적인 정황에 따라 다르다. 개인들의 가
치관과 인생관에 따라 행복한 삶의 내용도 다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관
계’다. 그렇다. 행복의 추구는 인간으로서 필요한 보편적 차원의 조건들이 마련되는 것뿐 아니라, 궁극
적으로 가장 중요한 조건인 함께 삶을 나누는 ‘사람과의 관계’에 수렴된다. 삶을 동반하는 사람과의 관
계에서 진정한 나눔의 기쁨이 있는 삶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다.
유엔에서 발표한 2021년 국제 행복 리포트를 보면, 한국은 세계에서 50위를 차지한다. 한국의 행복
수치는 경제적 위상에 비하면 참으로 낮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행복한 삶을 위한 보편적 기반이 불안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조건과 동시에 개별적 조건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사회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부동산에 대한 광적인 집착, 수도권과 지방
의 교육문화적 격차, 포괄적차별금지법이나 생활동반자법 같이 차별을 넘어서서 평등한 관계망을 인정
하고 보호하려는 법안들의 입법화가 실행되지 않고 있는 사회에서 ‘사람’과의 진정한 관계와 사랑을 가
꾸어 나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유엔의 2021년 국제 행복의 날 캠페인의 주제는 “모든 사람을 위한 행복 영원히”이다. 나는 행복한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유한한 삶에서 나는 나에게 행복의 경험과 의미를 주는 소중한 그리
고 진정한 관계를 가꾸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과 씨름하면서 불필요한 집착과 욕망, 또는 진정성과 진
실을 외면하는 가식적 삶의 감옥에서 조금씩 발을 빼는 연습을 과감히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죽
음을 향해 가는 존재다. 이 삶을 매듭짓기 직전에 진정한 행복을 외면해 온 삶을 후회하는 것은 너무
나 늦은 치명적 손해가 아닌가.
뉴노멀, 되찾아야 하는 다섯 가지 가치
2021년 7월 2일, 제네바에서 열린 제68차 <유엔무역개발회의>의 이사회에서 한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이제 한국은 다른 31개의 나라와 함께 선진
국으로 분류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선진국이라는 판단 기준은 경제 부분이다. 그런데 복합적인 의미
에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 분야와 같은 수치화할 수 있는 ‘보이는 가치’의 성과만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수치화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가치’의 지속적인 심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진정한 선진
국을 구성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그동안 지나쳐온 인간적 가치에 대해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선진국을 구성하는 가치, 다섯 가지: 첫째, 존중의 가치다. 존중의 가치란 내가 만나는 무수한 타자들
을 나와 평등한 동료 인간으로 생각하며 존중하는 것이다. 대중교통에서, 편의점에서, 음식점에서, 시
장에서, 관공서나 다양한 기관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 또한 택배 노동자, 경비원 등 일상으로 직간접적
으로 만나게 되는 모든 이가 나의 동료 인간이다. 동료 인간으로서 타자들에 대한 존중의 가치를 회복
해야 한다. 그들 모두 나와 함께 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 12 -

질문 빈곤 사회

둘째, 인내의 가치다. 타자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개입하면서 우리는 종종 나 자신의 기대나 방식과
다른 것을 경험한다. 그러면 즉각적으로 실망을 표현한다. 타자에 대한 실망은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
절감으로 이어진다. 사람마다 걷는 속도가 다르듯, 삶의 방식이나 사유방식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그 다름을 받아들이고 기다리면서 서로의 발걸음 속도를 조절하면서 걷듯, ‘함께’
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정직의 가치다. 두려움, 불안감, 슬픔, 비탄과 상실 등은 인간 보편의 감정들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모든 것을 다 갖추어서 마냥 행복할 것 같은 사람들도 사실상 내면에는 이러한 감정과 힘들게 씨
름한다. 늘 행복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자신을 설정하는 ‘가식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을
하고, 동시에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직의 가치를 실천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넷째, 친절의 가치다. 우리의 인간됨을 실천하는 것은 거창한 명제나 행동만이 아니다. 친절과 같이 아
주 사소한 것 같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백화점 직원들이 손님에게 보이는 인위적 감정노동으로
서의 친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친절은 한 인간으로 다른 인간에게 가지는 배려이며,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무수한 타자들을 향한 고마움의 미소와 몸짓이다.
다섯째, 연민의 가치다. 연민이란 동정과 다르다. 동정은 ‘불쌍하게 여김’의 감정이다. 동정은 동정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윤리적 위계를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형성한다. 그러나 연민은 ‘함께 고통함’
의 감정이다.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의 아픔과 상실에 함께하고, 그 고통의 원인에 ‘왜’를 물으면서 연
대하는 것이다. 연민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보는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어 어떤 종류의 윤리적 위계
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겪은 아픔이 ‘왜’ 생기는가에 관심을 갖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함께
넘어서기 위하여 다층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망각하는 존재다. 또한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가도, 다시 뒤로 되돌아가는 존재
다. 한번 깨닫고 단단히 결심해도, 잊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에게 또한 서로에게 이러
한 가치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면서, 이 가치들을 소중하게 다루고 지켜내야 한다. 정치, 과학 또는 테
크놀로지는 우리의 외부 세계를 발전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는 변화만으로 우리 삶
의 질이 자동으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내면세계를 구성하는 가치들은 결코 돈이나 과학으로
살 수 없다. 만약 이러한 인간적 가치가 활성화되고 작동하는 사회가 된다면 우리는 삶의 질을 높이며
보다 행복한 삶의 여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선진국이란 보이지 않는 가치가 사회에 확산
되어 자리 잡은 사회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선진국다움’을 이루게 될 것이다.

- 13 -

질문 빈곤 사회

반응형